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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이야기, 가야금]가시리 가야, 가얏고

글 천수림(아트저널리스트)
흘러간 역사 속,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랑하고 또 이별했을까. 가야의 숱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전해진 악기, 애연愛戀의 소리가 있는 가야금이다.
세상에 있는 아프고 애 저린 소릴랑은 죄다 한데 묶어 열두 줄 가얏고에 실어 흐느껴도 설움은 마디마디 더욱 에이는 듯 피맺혀 마침내 우륵은 노래하고 춤추었다. 김상훈의 시 <우륵의 춤>1) 중

대가야의 악사 우륵于勒에게는 ‘화보’라는 연인이 있었다. 우륵의 연주는 누구든지 마음을 빼앗길 만큼 아름다워 가야금을 만든 가실왕과 공주도 그를 가까이 두고 연주를 즐겼다. 우륵에게 가혹한 운명을 안겨다 준 것은 바로 이 가야금에서 비롯되었다.

공주는 가야금을 가르치던 스승이기도 했던 우륵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공주는 우륵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지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 장면을 본 이들은 이 사실을 왕에게 고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칠 것이라 짐작한 공주는 우륵을 신라로 몰래 망명시켜준다.

신라 진흥왕도 그를 아꼈지만, 우륵의 마음은 늘 가야에 두고 온 연인 ‘화보’에게 닿아 있었다. 어느 날 우륵은 가야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고자 산에 올랐다가 자신을 향해 서 있는 두 여인을 발견한다. 반가운 마음을 접고 우륵은 두 여인을 돌려보낸 후 속세를 떠났다.

여기까지는 어디까지나 전설이다. 문자가 없던 시기, 구술로 전해지던 이야기라고 해서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때로는 민간인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전설2)이 어쩌면 기록된 역사보다 더 진실에 가까울 수 있을 것이다. 이 전설에서는 우륵이 신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 대가야 4국 시대의 국내 정세와 일본, 중국 등 국제정세 틈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로 둔갑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륵이 사랑해 마지않던 가야금은 우리의 전통 현악기로 가야국의 ‘가야’에다 현악기를 뜻하는 우리말 '고'가 합쳐져 ‘가얏고'로 불리다 현악기를 뜻하는 한자 ‘금'자가 붙어 현재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오동나무 통에 명주실로 된 열두 줄을 매어 손가락으로 뜯는 방식으로 연주되는 악기이다. 기록에 따르면 가야금은 가야국의 가실왕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가야금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역에 널리 퍼져 있는 롱 지터long zither류의 전통악기 중 하나로 분류할 수 있다. 중국의 정, 일본의 고토, 베트남의 단트란, 몽골의 야탁 등이 가야금과 비슷한 악기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악지樂志에 “가야금은 중국 악부의 쟁을 본받아서 만들었다. … 신라의 고기에 가야국 가실왕이 당의 악기를 보고 가야금을 만들었다.加耶琴 亦法中國樂部箏而爲之. … 新羅古記云 加耶國嘉實王 見唐之樂器而造之”라고 밝히고 있다.

일본 악기 고토 연주 모습
EBS 다큐프라임 <하늘의 땅, 몽골>의 한 장면
이 이르기를 여러 나라의 방언이 각각 다른 소리를 내니 어떻게 하나로 할 수 있겠는가. 王以謂諸國方言各異聲音 豈可一哉.

6세기 쇠퇴하던 가야를 다스렸던 가실왕은 위와 같이 한탄하면서 성열현省熱縣 출신인 우륵에게 명하여 악곡을 짓게 했다고 전해진다.3) 가실왕이 ‘음악’을 통해 대가야를 통합하고자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5세기 후반의 대가야가 선진 외래문물을 들여오고 활발한 국내외 활동을 통해 음악과 악기에 대한 교류도 활발했을 풍경을 상상할 수 있다. 신라 등 국내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등 국제교류도 활발하게 진행되던 시기에 가실왕이 가야금을 통해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우륵이 지은 열 두 곡은 <상가라도>, <하가라도>, <보기>, <달기>, <사물>, <물혜>, <사자기>, <거열>, <사팔혜>, <이사>, <상기물>, <하기물>이다.

이 음악은 현재 곡 이름만 전해질 뿐 악보나 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만, 곡 이름이 당시 가야의 지명에 기반하고 있어 당시 지장에서 부르던 민요에 기반을 둔 음악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대가야는 합천, 거창, 함양, 남원 등 각 지역에 영향을 미칠 만큼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열두 곡은 우륵이 귀화한 후 신라의 제자들에게 전승되어 편곡되었고 이후에 신라의 궁중음악인 '대악'으로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고려 고종 때 한림의 유생들이 지은 것이라 추정되는 ‘한림별곡翰林別曲’에도 가야금이 등장한다.

아양의 거문고, 문탁의 피리, 종무의 중금 대어향, 옥기향이 타는 쌍가야금 김선의 비파, 종지의 해금, 설원의 장고로 아, 밤새워 노는 모습 그 어떠합니까. 일지홍의 빗긴 피리 소리, 일지홍의 빗긴 필 소리 아, 듣고서야 잠들고 싶어라.

이처럼 한림별곡의 가사처럼 가야금과 비파, 장고, 해금, 피리 등 다양한 악기가 등장한다. 현재는 가야금의 영혼이 옛 대가야의 지역에서 열리는 ‘고령 가얏고 음악제' 등 다양한 가야금 관련 축제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 역사란 참 아이러니하다. 정치적으로 아무리 흔적을 말살한다 해도 음악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하니 말이다. 어떤 나라일지 상상할 수도 없는 가야국의 흔적을 우리는 가야금을 통해 느낄 수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 중심의 역사에서 대가야는 철저하게 은폐되어 있어서 가야의 흔적을 추적하기란 쉽지 않다. 대가야의 신화적 흔적은 신라 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석이정전釋利貞傳>을 조선시대에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1481)을 편찬하면서 인용한 구절에서 엿볼 수 있는데, “가야산신과 하늘신 사이에 태어난 두 형제 가운데 형은 대가야 시조인 이진아시왕이 되고, 동생은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일연이 고려 중기인 1075~1084년 사이에 김해의 지방관으로 파견된 어떤 문인이 지은 <가락국기駕洛國記>를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인용하면서 금관가야 중심의 건국신화도 전해지게 된다. 이외에도 “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황금알이 깨어 6명의 동자가 되었는데, 가장 먼저 깨어나온 동자가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되었고 나머지 다섯 동자가 다섯 가야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현악기 연주 형상의 토우 ©국립중앙박물관

서기 300년대부터 가라국은 ‘대가야국’이라 불렸다. 가야는 백제와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며 성장했다. 479년, 하지왕荷知王은 중국으로부터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이라는 이름을 받아 왔다고 전한다. 서기 500년대에 들어서는 백제, 신라와 비슷한 단계까지 성장했지만 신라에게 점령당하면서 활발했던 문화적 흔적도 역사 속으로 묻혀버렸다. 출토된 대가야 토기 중에 ‘대왕大王’이라는 글씨와 ‘하부사리리下部思利利’란 글씨가 새겨져 있는 토기가 있는데, 수도 고령에 있는 대왕이 하부라는 지방을 다스리고 있다는 말이다. 현악기를 연주하는 듯한 모습의 토우(4-5세기로 추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나 고아리 벽화고분의 무덤구조와 연꽃무늬나 지산리 44호분에서 출토된 청동 그릇과 등잔 및 입 큰 구멍단지 등의 유물을 보면 당시 ‘철의 왕국’이라고 불렸던 대가야의 예술 문화가 얼마나 발전해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조금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일본 열도 각지에서도 대가야 계통의 토기와 철기들이 출토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가야가 일본과도 얼마나 활발하게 교류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명성을 잃은 가야는 영토 전쟁을 벌이던 신라와 백제의 대립으로 멸망하고 만다. 가야가 결국 신라에 복속되면서 역사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가야인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가야인들이 일본으로 대거 이주한 흔적은 지금도 일본의 오사카 남부에 있는 카쿠니신사, 카라, 아라, 아야, 가야 등의 이름이 남아 있는 신사와 유물로 남겨져 있어 그 흔적을 추적할 수 있다. 특히 언어에 그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아스카飛鳥’는 ‘날아온 새’라는 뜻으로 한반도에서 온 사람들을 지칭하며, ‘가야’의 일본어 표기인 ‘가라から’는 일본 문화를 모르는 '외국인 또는 외국제 물건’을 의미한다. 일본인에게 가야인은 최초의 외국인이었을 것이다. 가야금은 신라로 통합되거나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가야인과 함께 이주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창원이 소장 중인 신라금©한겨레음악대사전
악학궤범 영조판 권7 내지©국립국악원

일본에서는 신라의 음악을 ‘신라금新羅琴, Shiragigoto’이라고 불렀다. 한 일본 문헌에는 “신라악은 금과 무로 구성되어있다.”라고 쓰여져 있는데, 이 때의 금은 가야금을 말한다. 신라 때 풍류가야금의 형태는 현재 일본 동대사의 ‘정창원正倉院’이라는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연대가 819년으로 표시된 두 대의 이 악기는 <악학궤범樂學軌範>(1493)에 기록된 가야금의 그림처럼 양이두를 지니고 있고, 오동나무 몸통 위에 12줄이 얹혀져 있다. 양이두는 가야금의 부들(매듭끈)를 매는 부분으로, 줄을 매는 모양이 양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타국의 발현악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 고유 가야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일본의 역사기록 <문덕실록文德實錄>에는 850년 일본 궁중에서 신라인이 신라금을 전수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북창 가까이 가야금 놓았더니 바람 스치매 저절로 울음 우네 가만히 앉아 고요히 듣노라면 하늘의 풍류 바로 이 아니런가

위의 시는 고려시대 문인이었던 이규보李奎報의 ‘바람결에 우는 가야금4)’이라는 시조의 첫 절이다. 그의 시처럼 음악처럼 바람이 스치는 날 듣는 가야금 소리는 더욱 아련하다. 바람처럼 흘러 조국도 아닌, 나도 아닌 삶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악기들도 내전과 함께 예기치 못한 여행을 떠났다. 우리는 가야금 소리를 통해 결코 만나지 못할 오랜 과거의 가야인들이 떠난 길에 함께 서볼 수 있다. 봄에서 여름의 기운으로 훈풍 불어오는 오월, 마음을 흔들 가야금 연주 한 곡쯤 들어보기를 추천한다.

추천! 한 번쯤 들어보면 좋을 가야금 연주곡

  • 18현 가야금 협주곡 ‘우륵의 춤’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

  • <목요풍류> 가야금산조국립국악원

[각주]

1) 우륵의 심정을 노래한 김상훈의 시 <우륵의 춤> 중 일부

2) 출처: http://www.culturecontent.com

3) 대가야박물관 홈페이지 참조 http://www.daegaya.net

4) <동국이상국후집東國李相國後集> 제4권 고율시古律詩 중 ‘바람결에 우는 가야금加耶琴因風自鳴’의 일부

  • 천수림(아트저널리스트)
  • 삶은 여행의 여정이며, 여행의 영향력은 삶에서 결코 사소하지 않다고 믿는다. 2018서울사진축제 프로그램 디렉터, 월간 <사진예술> 편집장으로 활동했고, 각종 미술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KBS1 라디오 <문화공감>에서 ‘중국예술기행’을 진행했고, 저서로는 <북경살롱>, <엄마네 레스토랑으로 저녁 먹으러 갈래?>, <세 도시 이야기(공저)>가 있다. 현재는 아트저널리스트이자 시각문화 비평가로 다양하게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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