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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극을 취하고, 창극을 내주다국립창극단 <패왕별희>

글 정원(공연칼럼니스트)
“한 번 웃으면 만고에 봄이요, 한 번 훌쩍이면 만고에 근심이라.” 명대사로 잘 알려진 <패왕별희>가 창극이라는 옷으로 갈아입고 환생했다. 다시 이별의 운명을 껴안은 그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국립창극단의 파죽지세가 대단하다. 창극 <패왕별희>가 첫 공연 이후 연일 매진이라 티켓을 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창극이 이렇게나 인기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기분 좋은 소식 아닌가. 더 많은 관객에게 가 닿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비로소 빛을 발하는 것 같다.

그간 국립창극단은 판소리 다섯 바탕만 아니라 그리스 비극과 신화, 브레히트의 희곡 등 다양한 텍스트를 창극으로 재탄생시켜왔다. 이번 신작을 계기로 중국의 경극과 합을 맞추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에도 놀라지 않은 이유다. 아힘 프라이어·안드레이 서반·옹켕센 등 해외 연출가와 함께한 내력이 있기에 경극 연출가와도 어렵지 않게 소통할 것이란 믿음도 있었다. 다만 동명 영화의 아우라를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인지 궁금했다.

<패왕별희>는 배우 장국영이 출연하고 천카이거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1993년 개봉)로 잘 알려져 있다.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난 배우를 기릴 때마다 손에 먼저 꼽는 명작이기도 하다. 영화는 경극 배우로 성장하는 두 예술가의 삶과 사랑을 아름답고도 처절하게 그려냈다. 평생을 경극 배우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죽기 전까지도 배우로 살아간 주인공들이 영화 속에서 연기한 작품이 바로 <패왕별희>다. 경극을 대표하는 작품이자, 중국의 역사소설을 토대로 영웅과 그의 연인의 비극적인 결말을 담고 있다.

창극 <패왕별희>는 동명 영화이자 경극에서 이름을 빌려왔다. 하지만 대본은 영화나 경극을 따르지 않고 여러 텍스트를 모아 각색했다. 현재 타이완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연출가이자 경극·영화 배우로 무대와 스크린에 얼굴을 비친 우싱궈(吳興國)가 연출을 맡았다. 다소 인상적인 부분은 클라우드 댄스 시어터의 무용수 이력을 지닌 린슈웨이(林秀偉)가 대본을 집필했다는 점이다. 그녀는 최근 극작가이자 안무가·연출가 등 다방면으로 작업하고 있는데, 이 작품의 텍스트와 움직임을 모두 담당했다. 경극을 대표하는 이들의 카운터파트로는 소리꾼 이자람이 나섰다. 판소리만들기 ‘자’를 비롯해 국립창극단과 <흥보씨>, <소녀가> 등 작품을 함께하며 다양한 시도를 해온 그녀가 작곡과 작창을 맡아 타이완과 한국을 잇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양의 두 전통이 발휘한 시너지

창창한 오강이 가로지르는 무대 위에 가장 먼저 맹인 노파가 등장한다. 창극의 도창 격인 인물로, 작품의 앞머리에서 향후 펼쳐질 일을 설명한다. 전작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헤큐바 역으로 세상을 호령하는 소리를 들려준 김금미의 존재감은 공연을 열기에 충분했다. 여느 비극에서나 그렇듯 맹인 노파는 어린 항우에게 ‘검에 손 대지 말라’고 거듭 강조하지만, 박혀 있던 검은 뽑히고 역사는 반복된다.

프롤로그와 같은 1장이 막을 내리면 본격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작품은 항우가 함양에 입성한 후 열린 홍문연부터 오강에서의 자결까지 다루고 있다. 무엇보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구성하는 다양한 인물의 이야기를 짜임새 있게 구성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초나라와 한나라의 여러 인물이 말을 주고받는 홍문연 장면이 특히 그러한데, 일인다역을 소화하는 소리꾼답게 각각의 캐릭터를 온전히 흡수한 배우들의 면면이 돋보였다. 이들의 능수능란한 대화 장면은 관객을 이야기에 집중시켰고, 한신의 독백과 항장의 검무, 번쾌의 등장 등 기록된 역사의 변방에 위치하는 세부 인물들이 흥미를 더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많은 작품이 단체로서의 국립창극단을 주목하게 했다면, <패왕별희>는 역량 있는 배우 개개인에게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경극의 요소는 주로 배우들의 움직임에 녹아들었다. 경극은 흔히 노래와 암송, 춤, 무예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창극 <패왕별희>는 노래와 대사는 판소리이되, 춤과 무예는 경극의 것을 따른 듯 보인다. 판소리의 너름새가 주로 상하 움직임으로 이루어진다면, 경극에서의 춤은 좌우로 움직이거나 양팔을 수평으로 뻗고 손목·팔목 움직임에 악센트를 주는 식이다. 절도 있게 마디마디 끊는 경극식 움직임이 자칫 부자연스러울 것으로 생각했으나, 예상 밖에 판소리와 잘 어울렸다. 특히 검지와 중지 손가락을 들어 끝을 맺는 동작은 시김새와 절묘한 조화를 이뤘다. 국립창극단 배우들이 움직임을 익히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눈에 선했다. 다만, 전투를 표현한 무술 장면은 어색한 부분이 많았고 합이 잘 맞지 않아 흐름이 끊기곤 했다.

국립창극단이 2015년 초연한 <적벽가>(연출 이소영)와 견주어 본다면 <패왕별희>는 상대적으로 무대도 작고, 출연진의 숫자도 적다. 하지만 깊이감이 돋보이는 무대 세트와 화려한 의상, 조명 등 요소가 작품의 스펙터클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장 구분마다 삽입된 영상은 작품의 결을 헤치지 않으면서도 전쟁터의 웅장한 풍경을 상상하게 했다. 달오름극장보다 큰 무대에서 공연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창극과 경극 사이 중심 잡기

그러나 만족스러운 부분만큼 아쉬움도 짙다. 창극 <패왕별희>는 전쟁에서 패했으나 역사에 기록된 항우의 이야기와 패왕과 우희의 비극적 이별 중에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사마천의 ‘사기’와 역사소설 ‘초한지’, 경극 <홍문연>과 <패왕별희>를 2시간여 길이로 엮은 대본의 개연성이 부족하다 보니 의아함만 남긴 채 막이 내려버렸다. 첫 장면에 잠깐 등장한 뒤 2부까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우희가 어떤 심정으로 검무를 춘 뒤 자결을 택하게 되는지, 전쟁 영웅인 항우는 홍문연에서도 갈팡질팡하더니 왜 초나라의 노래만 듣고도 그토록 혼란스러워하는지, <적벽가>도 아닌데 군사들의 설움은 어찌 그렇게 큰 비중으로 그려지는지. 영화나 경극과 달리 창극 <패왕별희>가 오늘의 관객에게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없었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경극을 품기 위해 창극에서 내어준 것들이 아쉽다. 우리 소리의 본질은 비극성에 있다. 하지만 경극은 기본적으로 희극적 성격을 지닌다. 그 때문에 절절한 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움직임이 등장할 때면 집중력이 흐려졌고, 오롯이 소리를 만끽할 기회는 드물었다. 경극의 색을 빼고 우리 소리로 오롯이 완성한 <패왕별희>였다면 우희와 항우의 이별을 더욱 극적으로 그려지지 않았을까. 창극과 경극 사이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무엇을 내어주고 무엇을 취할지에 대한 고민이 아쉽다. 캐스팅 역시 그렇다. 우희 역의 김준수는 더할 나위 없이 배역에 어울리는 뛰어난 배우였으나, 경극에서조차 남성 배우가 여성 역할을 연기하는 관습이 없어진 지금도 이러한 캐스팅이 유효한지는 의문이다.

창극 <패왕별희>가 보여준 시도는 오늘날 공연예술, 특히 전통예술에 있어 꼭 필요한 것이다. 협업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장르의 외연을 무한하게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시도’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국립창극단의 전작 <흥보씨>는 판소리 ‘흥보가’의 이야기를 동시대적으로 완전히 뒤틀어 바라보고자 했고, <트로이의 여인들>은 서양 문화권의 이야기를 우리 식으로 재탄생시킨 결과물이었다. <오르페오전>이 음악극으로써 창극이 가 닿을 수 있는 오페라 양식에 대한 실험이었다면,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유실된 우리 소리의 복권 작업이었다. 그렇다면 <패왕별희>는 창극과 경극을 만나게 함으로써 무엇을 얻었는가.

공연의 막은 내렸고 무대에 충분한 박수를 보낸 지금, 우리는 이 작품이 남긴 의미를 보다 냉철하게 짚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익숙한 시선으로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경극과의 접붙여보면서 파악한 창극의 고유한 장점이 무엇인지 찾아낼 필요가 있다. 영화 <패왕별희>는 검열이 한창 심하던 1990년대 초 중국 사회에 등장해 파란을 일으켰고, 뛰어난 예술성으로 단순한 이야기 이상의 영향력을 남긴 작품이다. 2010년대 끝자락에 마주한 창극 <패왕별희>는 우리 예술사에 어떤 기록으로 남을 수 있을까.

  • 김태희(공연칼럼니스트)
  •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무용이론을 공부하고 있다. 월간 ‘객석’과 서울문화재단·국립극장에서 잡지를 만들었으며,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제12회 ‘젊은 비평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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