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전통처방전

전통예술 지원정책새롭게 작도하기

출범 10년,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이 나아갈 길 글 성혜인(음악평론가)
전통이라는 점 A와 현대라는 점 B 사이 전통공연예술이라는 AB 선분이 있다. 기하학에서 완전한 작도를 위해서는 다음의 네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해석, 논증, 증명, 그리고 음미이다. 여태 해석과 논증에 집중해온 전통예술계는 이제 남은 두 단계를 넘어설 차례다.
건강한 청사진

현재 전통예술 현장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화두는 ‘대중의 공감대를 어떻게 이끌어낼 것인가?’가 아닐까 싶다. 물론 일반화할 수는 없겠으나 대중의 주목을 받는 일이 예술적 성취로서 중요하다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반면 이러한 담론이 전통예술 현장의 정체를 의미한다는 견해도 있다. 매해 국가의 지원을 받은 수많은 결과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흥미롭고 밀도 높은 예술 담론이 형성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누군가는 절망적인 어조로 전통예술계의 위기를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속적인 실망과 정체 속에서도 섣불리 ‘위기’나 ‘죽음’을 선언하며 관망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평론가의 의무다.

전통예술계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은 대부분 국가 지원에 의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원정책은 전통예술의 현재를 조형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그러나 지원의 수혜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지원정책의 방향성을 의식한 편향된 결과물들이 산출될 위험도 분명 있다. 따라서 누군가가 전통예술계의 위기를 선언한다면, 그 위기는 예술가들의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지원정책의 운용에 개입하는 사람들의 실패에 기인한다. 지원정책의 구체적인 상을 그려낼 때 전통예술계에서 좋은 예술이란 무엇인지, 현재 유의미한 시도란 무엇인지에 대한 기준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점검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전통예술계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가장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전통예술과 일련의 창작활동에 대한 건강한 청사진을 질문하고 재설정하는 일이다.

2018 신진국악실험무대 <맺고 풀고>
2018 신진국악실험무대 <고영열의 남도여행>
물적 지원에서 질적 지원으로

올해 10주년을 맞이한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도 전통예술계의 지형도를 그려내는 데 중요한 축을 담당해 왔다.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은 재현 및 복원을 지원하는 사업부터 신진 예술가를 발굴하는 사업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의 사업을 수립하여 최대한의 행정적 노력을 기울여 왔다. 지난 10년을 되돌아보며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전통예술이 나아가야 할 길을 다시 한 번 반문(盤問)해야 할 시점이다.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이 지원정책의 방향을 재검토하여 기존과는 다른 유의미한 담론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기 위해서는 다방면의 노력이 필요하다. 현장에 대한 깊은 이해는 물론이고 예술가들의 행보에 대한 애정 어린 추적이 수반되어야 한다. 나아가 전통예술과 관련된 첨예한 문제의식을 포용하고 적극적으로 독려하며 함께 고민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이때의 지원정책은 단순한 물질적·행정적 조력자의 입지를 가뿐히 뛰어넘는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도전적인 모델은 레지던시이다. 전통예술계에서도 레지던시 운영에 대한 논의가 산발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전통예술계의 생태에 적합한 모델이 구축된 적은 없다. 레지던시의 가장 큰 장점은 예술가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다양한 유·무형의 지원을 할 수 있는 창작의 거점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전통예술계의 예술가를 지원하는 기존 정책은 예술가들의 결과물 발표를 위한 물적 지원에 중점을 두고 있다. 서류의 성실도를 바탕으로 예술가의 잠재력을 가늠하고 수혜자를 선별한 뒤 이후 모든 창작과정은 오로지 예술가의 역량에 맡겨진다. 반면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물적 지원과 함께 예술가의 창작활동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질적 지원을 보장한다.

그렇다면 전통예술계에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물적 지원에 중점을 둔 기존의 지원정책과는 달리 전통예술계에 생산적인 담론 형성에 적합한 포맷이기 때문이다. 전통예술계에는 여전히 ‘대중화’, ‘현대화’, ‘세계화’ 담론이 만연해 있다. 레지던시는 이러한 답보상태에서 벗어나 구체적이고 진취적인 목표와 과제를 함께 설정하고 그에 맞는 프로그램을 설계하여 예술가들의 활동에 건강한 방식으로 개입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창작활동을 위한 공간과 자본을 지원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창작 과정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요소 전반을 세심하게 지원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레지던시의 운영 방향을 조정해나가는 작업은 해당 필드에 대한 깊은 이해가 수반되어야 하는 일이므로 현장을 반성적으로 점검할 수 있는 시스템을 자연스럽게 갖추게 된다.

뿐만 아니라 레지던시의 가장 큰 이점 중 하나는 창작활동에 개입하는 다양한 사람들 사이의 활발한 교류를 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전통예술계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학계와 현장 사이의 괴리다. 전통예술 현장에서 활동하는 예술가와 글을 쓰는 연구자 사이의 간극은 너무나도 크고 현장에 필요한 이론과 비평은 요원한 상황이다. 실제로 현장에서의 문제의식과 학계에서의 문제의식이 크게 다르지 않음에도 이 둘은 완벽하게 분리된 것처럼 보인다. 전통예술계에 특화된 레지던시는 예술가들 사이의 교류뿐 아니라 흩어져 있던 기획자, 비평가, 연구자들과의 교류를 도모할 수 있다. 예술적 탐구에 필요한 비판적 피드백과 학술적 질료를 제공하는 신뢰할 수 있는 비평가와 연구자가 예술가와 함께 활발하게 교류할 수 있어야 한다. 전통예술계에서 레지던시라는 창작 거점은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물리적 안식처를 넘어 이론과 현장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1) 두산갤러리 뉴욕 ©두산갤러리
2) 플랫폼 창동 61 ©인터파크씨어터
그 이후의 실험

필자뿐만 아니라 많은 전통예술 정책 제안자들 역시 비평의 부재를 지적하고 비평가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그렇다면 대체 비평적 담론은 왜 중요한 것일까? 비평은 단순히 예술가와 작품에 대한 비판적인 피드백이 아니다. 이는 매우 협소한 의미의 비평이다. 매해 전통예술계에서는 수많은 공연이 쏟아져 나오지만 이를 비평적 시각에서 갈무리하는 작업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비평의 부재는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그 다음의 실험을 상상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예술가 역시 자신이 하고 있는 예술적 고민이 전통예술계의 역사적 지형에서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 인지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이후의 실험을 구상할 수 있게 된다. 지속적으로 우리의 현 위치를 복기할 수 있도록 이정표의 기능을 하는 것이 바로 비평이다.

전통예술계에서는 예술가에 필요한 실질적인 비평이 전무한 상황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예술가와 비평가, 연구자가 전통예술계에도 분명 존재하지만 모두가 공유하는 합의의 사안은 아니다. 레지던시라는 모델을 도입한다면 예술가와 비평가 혹은 연구자와의 활발한 지적 교류를 이끌어낼 수 있다. 연구/비평이 결부된 창작 시스템과 이 모든 단계를 총괄하는 기획 프로세스를 연례화하고 이를 통해 형성되는 전통예술계의 현장 담론을 적극적으로 역사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러한 일련의 시스템은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의 방향성을 지속적으로 검토하고 재설정하는 작업에도 좋은 토대를 제공해주리라 믿는다. 핵심은 단순히 레지던시를 운영할 수 있는 물리적인 공간을 설치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와 연구자, 비평가, 기획자를 긴밀하게 연결하여 현재의 예술 담론을 꾸준히 반성하고 논할 수 있는 전통예술계만의 창작 플랫폼을 만들어야 한다. 언제나 정책에 관한 제언에는 강한 책임감이 따라붙는다. 전통예술계를 둘러싼 수많은 현실요건은 무겁고 복잡하지만 그에 비해 말과 글은 이를 온전히 고려하지 못한 채 성기게 수합된 파편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전통예술계만의 유효한 담론을 끌어내기 위한 질적 지원에 대한 고민은 우리가 당면한 가장 중대한 과제임은 틀림없다. 지금 우리의 좌표를 감각할 수 있을 때만이 그 이후의 실험에 대해 상상할 수 있으므로.

[각주]

1) 두산갤러리 레지던스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젊은 한국 작가들에게 6개월 간 독립된 작업실과 아파트를 제공하여, 현지 미술관계자 및 관객과의 교류와 보다 폭넓은 문화적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2) 인터파크씨어터의 플랫폼 창동61
매년 입주∙협력 음악가들이 창작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안정적 공간(창공연장, 녹음실, 합주실 등 창작공간)과 전문 인력 지원 등의 혜택을 제공한다.

  • 성혜인(음악평론가)
  • 음악비평동인 ‘헤테로포니’ 필진, 비평지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웹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론으로 포섭되지 못한 전통음악의 미세한 잔해들을 건져 올려 발화하는 방법을 고민한다.

[콘텐츠에 대한 만족도 평가] 위의 기사가 어떠셨나요?

 전송

공진단에서 준비한 다양한 이벤트에 참여하세요! 추첨을 통해 푸짐한 경품을 드립니다.

이벤트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