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그들의 이력서

무대 위의 도인 소리꾼 이희문

명인名人보다는 도인道人에 가깝다. 그가 소리를 시작하면 도무지 안놀아날 재간이 없다. 노는 것에는 도가 텄으니, 도인이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Chapter 01신상털기

  • 이름이희문
  • 생년월일1976. 1. 23
  • 별자리물병자리
  • 특기/포지션소리
  • 소속이희문컴퍼니, 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이수자

Chapter 02인생이력

  • 2003동방학원영화전문학교 프로모션영상과
  • 2006서울예술대학 국악과 졸업
  • 2008용인대학교 국악과 졸업
  • 2010전국민요경창대회 대통령상
  • 2011중앙대학교 국악교육대학원 수료
  • 2014KBS 국악대상 민요상
  • 2015제23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전통예술부문
  • 2019KBS <도올아인 오방간다> 출연
전통의 매력에 빠지게 된 계기
우리 어머니는 유명한 소리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당연하게 경기소리를 듣고 자랐다. 어린 나이에도 나는 우리 집이 여느 집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는 유명했고, 바빴다. 나는 어머니를 좋아했고 많은 시간을 나와 함께 할 수 없는 어머니의 시공간적 부재 속에서 나는 어머니가 늘 그리웠다. 어머니를 좋아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부르는 모든 소리가 좋았다. 그러나 그 당시 여성 소리꾼에 대한 이미지는 시대적으로 환영이나 대우를 받지 못했다. 대단한 명창이라 할지라도 여성은 예술가로서 인정받기 힘든 시대였다. 그런 시대를 걸어온 어머니는 내게 소리를 가르치지 않으셨다. 개발도상국이 된 대한민국 대부분의 어머니들처럼 내가 안정적이고 일반적인 일을 하기를 원하셨다. 그래도 내겐 거부할 수 없는 음악적 유전자가 있었다. 커가면서 다양한 음악 장르의 음악을 듣게 됐고, 가수를 꿈꿨다. 어머니는 내게 음악인으로 존재했고, 나는 어머니로부터 시작된 존재였기에 내가 음악을 꿈꿨던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나의 변곡점
요즘은 사춘기를 중2병이라고도 하는데, 나는 고3병에 걸렸다. 다소 늦은 사춘기였다. 하필 나는 수능 1세대였다. 선택할 의지도 없는 내게 사지선다도 아닌 오지선다라니. 대학을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 않았지만 점수에 맞춰 학교를 선택했다. ‘대학만 들어가면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도 된다’는 조건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계속 가수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가수가 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별도리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군대로 도망을 갔다. 군 제대를 하고 나선 유학이라는 또 다른 도피처를 마련했다. 외국에 나가면 새로운 길이 열릴 거라 막연하게 희망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발달한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환상도 있었다. 일본에서 어학교를 다니던 중, 뮤직비디오 붐이 일었다. 트렌드에 맞춰 동방방송학교에 프로모션 영상과가 생겼고 나는 그곳에 입학했다. 음악이라는 틀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주 안에 머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영상을 배우면서 편집 작업에 매료됐다. 편집을 하고 싶어 영상을 찍었다. 대학 때 유일하게 열심히 했던 활동이 동아리 활동이었는데, 마침 그 동아리가 16mm 영화 제작 동아리였다. 삶에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 고주랑 명창과 함께

다시, 나의 변곡점
공부를 마치고 영상 일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어린 시절 이모라 부르며 따랐던 이춘희 선생님의 공연을 보러 갔다. 내심 영상 쪽 일거리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였다. 익숙한 곡들이 나오고 나도 모르게 객석에 앉아 노래를 따라 불렀다. 이춘희 선생님이 그런 나를 재밌게 보셨는지 “소리를 해보고 싶지 않냐?”고 물으셨다. 무엇에 홀린 듯 소리를 배우게 됐다. 이춘희 선생님은 재담꾼이다. 소리로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이야기꾼이시니, 내가 선생님의 말에 빠져든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선생님은 다양하고 많은 요구를 하셨다. ‘시대가 변했으니 전통음악도 정식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말에 서울예술대학에 들어가게 됐으니 말이다. 막상 학교에 들어가니 모든 학생이 공강시간에도 쉬지 않고 연습을 할 만큼 치열했다. 영상과 소리 사이에서 선택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이지선다라고 해도 선택은 어려웠다. 감독 입봉만을 앞둔 시기였기에 주변에서 왜 이제 와서 다른 것을 시작하려고 하냐며 만류했다. 소리를 시작한 지 반년이 되었을 때 '역시 이쪽인가’라는 생각이 들며 무게감이 실렸다. 영상은 트렌드를 따르며 추향趨向하는 일이지만, 소리는 점점 깊어지며 오행奧行하는 일이었다. 여러 꿈을 포기하고 도망치며 청년기를 보낸 나는 스스로를 ‘지구력 없는 인간’이라고 느끼고 있었기에 ‘나만의 깊이를 가지는 일을 선택해야겠다’, ‘이 선택이 마지막이다’라고 마음을 굳혔다.
자각의 시간
<프린세스 바리> | 출처 아리랑TV 유튜브

처음 소리를 배울 때 속도가 빨랐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 피에 흐르는 전통음악의 DNA, 자라온 환경을 통한 무의식적 조기교육 영향까지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소리를 배운지 3~4년 정도 되었을 때부터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2008년부터 개인 작업을 열심히 했지만 뭔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주름 없는 한복을 입고 멋진 소리를 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인가.’ ‘수많은 제약 속에서 나는 가만히 존재해야 하는 것일까.’ 생각할수록 갈증이 났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랐다. 수많은 경계 속에서 혼란스러웠다. 그러던 중 다른 문화계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하나둘 내 속에 감춰졌던 본능이 깨어났다.그 사람들 중 나를 가장 많이 깨뜨린 사람은 안은미 선생님이었다. 안은미 선생님과는 2006년에 만나 2007년 함께 <프린세스 바리>라는 작품을 했었다. 그 당시에 나는 선생님을 피해 도망 다녔다. 선생님이 하는 말과 요구를 도통 알아듣지 못했다. 틀을 깨라는데 무슨 틀을 어떻게 깨라는 건지 몰랐다. 그런데 갈증이 시작되고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은 바로 안은미 선생님이었다. 나는 제 발로 찾아갔다. 선생님은 내게 “어중간하게 하니까 그렇지.”라고 하셨다.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기어이 ‘너는 어느 정도의 버짓에만 머물잖니.’라는 말을 듣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내가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은미 선생님은 하고 싶은 대로 하시는 분이었다. 하고 싶은 것 속에는 많은 것에 대한 포기와 손익이 계산되지 않는 투자가 있었다. 노력이든, 돈이든 있는 대로 쏟아부을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기억에 남는 작품

많은 작품이 있지만 나를 가장 크게 변화시킨 작품은 2013년에 했던 오더 메이드 레퍼토리 ‘잡ZAP’이다. 경기소리의 12개의 잡가 공연이다. 소리꾼으로서 이 12바탕을 무대에 세우는 건 큰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런데 연출에 대해 고민이 많이 됐다. 나는 안은미 선생님에게 나에게 딱 맞는 작품을 만들어달라고 연출을 의뢰했다. 선생님은 내게 “돈 쓸 준비 됐니?”라고 물으셨다. 아마도 그것은 돈이라는 요소에 담기는 욕망, 열정, 관심, 내 삶의 모든 것을 다 쏟아부을 준비가 됐느냐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연출은 이태원과 장영규에게 부탁했다. 내가 가장 존경하고 아끼는 두 작곡가에게 6곡씩 연출을 부탁했는데, 한 무대 위 비교선상에 놓일 수밖에 없으니 부담스러운 일이었음에도 수락해줬다. 180석밖에 안 되는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공연에 딱 1억이 들어갔다. 민간단체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듬해 이 공연은 유로파 페스티벌 오프닝 작품으로 초청을 받아 무려 23명이 무대에 올랐다. 이 또한 내겐 큰 의미가 있는 일이다.

오더메이드 레퍼토리 ‘잡’ ©이희문 컴퍼니
씽씽

오더 메이드 레퍼토리 두 번째 시리즈로 ‘쾌’라는 작품을 했는데, 그 음악적 형식을 그대로 가지고 ‘씽씽’이 만들어졌다. 장영규, 그리고 이태원. 이 둘이 나와 함께 음악을 해주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했다. 장영규는 천재성과 감수성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고, 이태원은 시대를 초월하는 열정가이다. 2016년 뉴욕에서 첫 쇼케이스를 하고, 미국의 한 페스티벌에 참여했다. 처음 보는 아시아인의 무대에 사람들은 반응하지 않았다. 우린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개의치 않고 막, 정말 막 놀았다. 우리끼리 재밌게 놀고 있으니 관객들이 반응했다. 우연한 기회로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인 NRP의 'Tiny Desk Concert'에 초대를 받았는데, 그 영상이 말 그대로 대박이 났다. 현재 그 영상은 280만 뷰를 돌파했다. 덕분에 많은 무대에 초대되었다. 작년의 활동을 마무리하며 상실감이 컸다. 나도 그랬고, 함께 했던 이들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씽씽의 이희문도 나고, 지금의 이희문도 나다. 달라진 것은 지금의 이희문은 그냥 ‘나’여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현재의 내게 가장 큰 숙제이다. 혼자 서는 것. 무대 위를 오롯이 나의 목소리와 에너지로 채우는 것.

Tiny Desk Concert ©NPR Music

Chapter 03 개인 취향

창작, 그리고 도전
나는 강남에서 자랐다. 강남 한복판에 있는 논에 물을 채워 스케이트를 타던 어린 시절부터 지금 빌딩으로 빼곡히 채워진 어바니즘까지의 변화를 모두 지켜봤다.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곳과 다르게 패러다임의 변화가 엄청난 속도로 빠르다. 일명 ‘빨리빨리 문화’의 속성 때문에 레퍼토리나 시리즈의 지속성이 어렵다. 그러나 나는 역으로 반복성을 주장한다. 그래서 오더 메이드 레퍼토리도 만들었고, 시리즈물 기획에 관심을 두고 있다. 좋은 것은 오래 지속된다. 전통도 그렇게 지금까지 연결되고 전승되어 온 것이다. 그 당시에 그것은 전통이 아니었다. 민요 또한 대중문화이고 생활이며 현시대의 문명이었을 것이다. 불과 오백 년 남짓의 기록이고 역사다. 지금 현재 내가 만드는 것이 훗날 전통이라 불릴 수 있고, 지금 내가 부르는 음악이 오백 년, 천 년 후에도 남길 바란다. 그러려면 더 좋은 것을 만드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가 창작과 도전을 해나가는 이유다.
영감의 원천
나의 원천 중 가장 큰 부분은 ‘삶’이다. 어머니의 삶, 나의 삶,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의 삶이다. 모든 이야기는 내 삶에서 시작된다. 후배들이 작품에 대한 조언을 구할 때 내가 가장 많이 하는 말도 ‘멀리서 찾지 말라’는 것이다. 주변의 흐름에 편승하면 그 흐름이 바뀌었을 때는 두 가지의 선택지뿐이다. 그 흐름을 쫓아가거나, 흐름 속에서 하차하거나. 내게 당면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그러면 이야기가 들리고 보인다. 다른 원천은 ‘놂’이다. 말그대로 놀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젊은 시절 아낌없이 놀았다. 놀기 위해 했던 투자와 시간이 조금도 아깝지 않다. 다만 지금은 무대 위에서 논다. 무대에서 쓸 수 있는 체력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밖에서 노는 건 몸을 사리게 된다. 아무 걱정 없이 놀던 때와는 다르다. 다 자기만의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는 ‘약속’이다. 나는 매년 하나의 신작을 만든다. 이것은 나와의 약속인데, 나는 천성이 게을러 약속을 정해두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동력을 부여할 동기의 키워드를 만드는 것이 도움이 된다. 나는 작품을 하면서 생명력을 느낀다.
다양한 협업

나이가 들수록 사람과의 소통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결국 다 사람의 일이고, 사람의 이야기다. 모두는 따로, 하지만 같이 연결되어 있다. <깊은 사랑>이라는 시리즈 작품을 같이 했던 오재우 작가와의 첫 만남에서 나는 내 인생을 몽땅 털어놨다. 함께 작업하려면 서로의 삶을 알아야 한다. 그 사람의 언어, 문화, 배경을 알아야 서로를 깊이 이해할 수 있고, 그래야 상대방이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다. 내가 하는 소리를 척 하면 알아듣고, 그가 하는 말을 딱 하고 알아듣고 싶었다. 소통은 경계를 허무는 일로 이어진다. 한 사람의 인생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사람으로 이어진다. 다른 장르로 연결되고, 새로운 길이 열린다. 모두 사람을 통해서다.

<깊은 사랑>의 한 장면
정체성과 스타일

80년대는 놀 거리나 장난감이 그렇게 많지 않은 시대다 보니 다들 부모님의 의상, 화장품을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당연히 소리를 하시던 어머니에게는 전통적인 것들이 많았다. 그때의 유희가 현재 스타일링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무대 위의 나는 내가 바라는 ‘노래하는 이희문’의 이상적 형태이자 일종의 캐릭터이고, 스타일링은 무대를 구현하는 방식 중의 하나일 뿐이다. 캐릭터로서의 나는 모든 것이 재탄생되길 바란다. 스타일링은 대부분은 주체적으로 한다. 원래도 패션에 관심이 많았고, 직접 스타일링을 하다보니 패션에 더 관심을 갖게 됐다. 패션쇼를 보거나, 소품을 사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내가 하는 음악의 장르와 어울리는 미장센을 생각하게 된다. 이건 아마도 영상 일을 했던 것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뮤직비디오를 다루는 일을 해서인지, ‘뮤직’과 ‘비디오’ 이 두가지 단어를 떼어놓고 생각하기가 어렵다.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이 조화롭게 만났을 때의 시너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작품 속 다른 모습을 선보이는 이희문
취미생활
드라마, 영화 등 주로 힘을 빼고 다른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이 좋다. <한국인의 밥상>이나 <동물의 왕국> 같은 프로그램이다. 요즘은 다큐멘터리나 드라마도 즐겨 본다. 리액션이 과한 예능 프로그램은 보지 않는다. 가식적이고 인위적인 표현은 마음이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여행도 좋아하는데, 최근에는 주로 베를린으로 간다. 예전의 베를린은 딱딱한 도시였는데, 지금의 베를린은 인터내셔널한 도시가 됐다. 여행을 가면 되도록 긴 일정을 비운다. 그래서 몇 달 전 미리 예악을 잡아둔다. 그래야 다른 일정을 잡지 않고 계획대로 여행을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직업의 특성상 규칙적인 생활이 어렵다. 국내외 공연 일정이 제각기 다르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일정과도 맞춰야 하고, 나의 게으름과 체력도 어느 정도 배려해줘야 한다. 작년에는 한 달에 한 번씩 해외공연을 나갔다 왔다. 시차 적응만으로도 많은 에너지가 소모됐다. 요즘말로 ‘워라밸’이라고 하는데, 일과 쉬는 것에 배분과 조율이 필요하다는 걸 나이가 들며 더 느낀다. 취미라기보다는 무대 위에서 뛰어놀기 위해 일주일에 2번 정도는 운동을 한다. 팬들이 주는 선물도 요즘은 건강식품으로 바뀌었다.

Chapter 04 이상과 현실

나의 현재 삶의 만족도
삶의 만족도는 굉장히 높은 편이다. 내겐 감사한 조건들이 많다. 어머니의 재력이 그렇고, 어머니의 부재 속에 나를 아끼며 키워준 외할머니의 손길이 그렇다. 팬들이 보내주는 건강식품 선물이 그렇고, 함께 협력해주는 사람들의 열정이 그렇다. 아쉬운 것은 건강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의지만으로 잘 되지 않는다. (나이 많으신 선생님들이 보면 뭐라고 하시겠지만) 젊을 때는 모든 일에 면역력이 높다. 놀 때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생각을 자유롭게 행동 에너지로 바꿔쓸 수 있다. 꾸미지 않아도 젊음 자체로 멋지고, 자신의 한계를 두려움 없이 시험해봐도 된다. 실패도 경험이 될 수 있다. 건강만 받쳐 준다면 나이가 들어도 해당되는 일이다. 그래서 요즘 내 인생의 최대 화두가 ‘건강’이다. 물론 심-신, 모두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자의적 시선, 타의적 시선
비주얼적으로 이미지 변신을 하는 것은 나의 콤플렉스가 반영된 부분이다. 아무것도 꾸미지 않아도 멋진 사람도 있지만, 나는 스스로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아닌 다른 인격을 만들어 낸다. 무속의 정신을 취하는 이유도 다른 존재가 되었을 때 모습과 인격이 변하는 방식이 좋기 때문이다. 무대 밖에서의 나는 단순하고 재미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무대에서만큼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만큼 유니크하고 재밌게 잘 노는 사람이고 싶다. ‘어머니가 뭐라고 안 하시느냐’,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있냐’ 등 그런 소리도 많이 듣는다. 어머니도 처음에는 싫어하셨다. 하지만 이춘희 선생님의 응원이 있었다. ‘다른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예술을 하는 것’이라는 선생님의 말이 어머니에게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지금 어머니는 나의 위대한 후원자다. 내가 바라고 또 보여주고 싶은 무대 위의 이희문이 있지만, 관객의 이해는 다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양한 시선과 해석을 통해 변화하고 존재하는 사람이다.
내 삶을 이끄는 것들
20대까지의 내 좌우명은 ‘주제 파악하기’였다. 나는 ‘나’를 가장 잘 알지만 객관화하기가 힘들다. 내 삶의 연출가적 관점에서 나를 볼 줄 알아야 한다. 배우가 아닌 연출가가 되면 객관적으로 나의 역할이 보인다. 내가 ‘이도령’인지, ‘방자’인지 그 역할을 알면 내가 할 일도 보인다. 내가 ‘이도령'이 아니라는 것에 실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단점은 보완하고 장점은 극대화할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었다. 누구나 이도령이 될 수 없다는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경쟁심, 시기심은 ‘0’ 같은 존재라서 무엇과 곱해도 결국 ‘0’이다. 결코 에너지로 변환되지 않는다. 30대가 넘어서 내 좌우명은 ‘척 하지 않기’로 변했다. 방자가 이도령 흉내를 내면 그것은 ‘이도령 흉내를 내는 방자’일 뿐이다. ‘방자 중의 방자’, 혹은 ‘세상에 없던 방자’가 되는 것이 더 멋지지 않은가. 누구를 따라 하려고 하면 아류가 되기 십상이다. 내게 잘 맞는 옷을 입었을 때, 관객들도 그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자연스러움은 설득력을 갖는다. 내 작품, 내 무대를 가장 잘 이해하는 관객은 바로 ‘나’여야 하는 것이다. 나조차 이해시킬 수 없는데, 누구의 마음인들 움직일 수 있을까.
나에게 전통이란

내게 전통은 가장 트렌디한 것이다. 백 년 후 내가 지금 하는 것이 거론되려면 지금 이 시대에 가장 핫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전통을 제대로 배워 그대로 행하는 것도 멋진 일이지만, 나는 훗날의 전통이 되어 길이 남겨질 일을 하고 싶다. 내 작업은 나만의 ‘성'을 짓는 일이다. 그 성에는 두 가지 원칙이 있다. 하나는 ‘세태를 쫓아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유명세는 살아남지만, 유명해지기 위해 지금 유명한 것을 따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권력이 생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권력은 장벽을 쌓는 일이다. 사람 사이에 경계를 만들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이 두 가지를 잘 지켜내고 싶다. 성을 멋있게 완성하고 나면, 애써 끌어모으려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아서 구경하러 올 것이다.

인터뷰 모습
앞으로의 계획
올해 신작 제목은 ‘날’이다. ‘나를 위한 것’이면서도 ‘날이 서 있는 것’이라는 중의적 표현이다. 작년 씽씽의 활동을 마무리하고 홀로서기를 시작했을 때 받은 상실감과 외로움을 에너지로 쓰기 위해 애썼다. 온전히, 오롯이, 나로서 무대에 서는 공연을 만들고 싶었다. 그 누구도 아닌 나에게 ‘나’를 증명해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번에는 음반과 공연을 함께 기획 중이고, 관객 참여형 공연이 될 것 같다. 공연은 공연자를 통해 무대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무대를 보고 즐기는 관객과 그 반응을 통해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 반응을 빨리 만나고 싶다.
도전해보고 싶은
10년쯤 후엔 꼭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 물론 내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이 시대의 소리가 어떤 것일까’하는 주제로 소리를 찾아가는 이야기. 현실주의 다큐멘터리 같지만, 초현실주의 판타지를 느낄 수 있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내고 싶다. ‘깊은 사랑’이라는 작품을 하면서 내가 어떤 소리들을 들어왔고, 해왔는지 돌아보면서 작업을 하게 됐다. 어머니, 선생님들, 그리고 예전에 들었던 고 음반 속 소리까지 작업에 담으려 하다보니 공연을 하는 내내 혼자 있는 것 같지 않고 무대 위가 어떠한 존재들로 꽉 차 있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됐다. 이것은 시공간의 세계를 초월한 순수한 영혼의 체험이다. 이런 걸 영화로 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키워드

  • 핏줄
  • 맥락
  • 관계와 소통
  • 망각과 기억
  • 솔직함
  • 삶과 이야기
  • 트렌드
  • 에너지
  • 건강
  • 유희
  • 소리와 파장
  •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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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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