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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명약

반짝이는 한순간을 찾아 평생을 헤맨 두 명

글 김연주(매일경제 기자)
덧없는 인생에 영원한 것이 있을까마는 불멸의 아름다움을 꿈꾸는 것 또한 한 생을 사는 이들의 숙명이 아니겠는가. '적로'는 쓸쓸한 침묵과 표표히 흩어지는 공허함 속에 필멸의 소리를 찾아 온 생을 헤매던 이들의 이야기다.
대금산조의 창시자 박종기는 말년에 폐병을 독하게 앓았다고 한다. 어느 공연 날이었다. 그의 대금 끝에 핏방울이 잠시 맺혔다 느리게 떨어졌다. 그가 토해낸 핏물이었다. 그는 그대로 뒤돌아 앉아 연주를 마치고는 앉은 자리에서 절명했다고 전해진다. 음악극 '적로:이슬의 노래'는 바로 이 일제강점기 때 대금 명인 박종기(1879~1941)와 그의 지음(知音) 김계선(1891~1943)의 이야기다. 박종기는 대금산조의 창시자이자 진도아리랑을 창작한 당대의 내로라하는 음악가였으며, 김계선은 궁중의 악사 신분으로 민요와 무가 반주 등을 가리지 않고 활동한 풍운아였다. 제목의 '적로'는 악기 끝에 매달린 입김에 의한 물방울, 또는 이들 예술가의 혼이 서린 핏방울을 뜻한다.
사람이야 사람의 일이야, 달빛에 맺히어서 새벽바람 내렸다가, 햇빛에 돌아가는 한 방울 이슬이로다. 한 숨결에 일어나서 한 시절을 노니다가, 자취 없이 흩어지는 한 자락 노래로구나
핏방울은 늘 인간이 유한한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여기서는 인간이 꿈꾸는 불멸의 예술이다. 생겨나는 그 순간 사라지는 소리. 이 이야기는 보이지도, 붙잡지도, 남길 수도 없는 소리를 위해 한평생 떠돈 이들의 이야기다. 필멸의 소리를 불멸로 남겨보려 했던 이들의 간절함이 바로 핏빛이슬, '적로'다. 종기와 계선이 벌이는 1941년 경성의 한여름 밤 술판으로 작품은 시작한다. 근래 깊어진 기침이 심상찮아 그간의 경성살이를 작파하고 고향 진도로 내려갈 참인 '종기'와, 누구보다 종기의 소리를 잘 알아주는 동료로 그의 귀향을 만류하려 성화인 '계선'이 이별주를 한 잔 걸치며 실랑이를 한다. 그때 두 사람 앞에 난데없이 이들을 모셔가겠다고 나타난 인력거 하나. 이유도 목적지도 모른 채 인력거에 올라타 도착한 곳에는 탁월한 목소리를 타고난 기생이었으나 십 수 년 전 불현듯 그들 앞에서 사라져버린 '산월'을 다시 만난다. 정확히는 '산월'의 딸이라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몽환적인 숲에 기거하는 이 여인은 죽은 산월일 수도 있고 혹은 소위 서양에서 '뮤즈'라 일컬어지는 음악의 여신일 수도 있다.
'적로'의 한 장면
가는구나 기어이 무정한 사람이야 내게서 떠나가는 그 모든 노래 마지막 피리 소리 아득히 멀어지매 어느 날 오려느냐 유정한 마음이야.
산월의 애절한 목소리를 타고 흐르는 구절 하나하나에 애절함과 아련함이 뭉근하게 배어난다. 세 사람은 술과 밤을 벗 삼아 자신의 그간 삶을 노래한다. 모두 때로는 잡히지 않는 소리를 포기해 뒤돌아 가다가도 다시 소리를 어떻게든 붙잡겠다고 돌아온, 끝없이 돌고 돈 삶이었다. 하지만 어디 소리만 그러한가. 종기와 계선을 말도 없이 훌쩍 떠나버렸던 산월. 결국 계선을 두고 소리 따라 떠나버리는 종기. 만나고 헤어지고 그래서 늘 그리워하는, 영원을 붙잡으려 아등바등하는 유한한 우리네 삶이 이와 같아 구성진 가락에 어깨를 들썩이다가도 어느새 마음이 촉촉하게 젖는다. 현재 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간판 극작가이자, 우리의 말맛을 제대로 살리는 대사로 호평받는 배삼식 작가가 극작을 맡았다. 아랍 시인 잘랄루딘 루미의 시 '모든 낮과 밤, 희미한 갈대소리, 그 음악이 사라지면 우리도 사라진다'라는 구절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작가는 덧없지만 반짝이는 그 순간을 찾아 한평생을 헤매는 예술가의 삶을 아름다운 필체로 그려냈다. 대사 하나하나가 시적이면서도 조약돌처럼 단단하다. 애조만 흐르는 건 아니다. 호쾌하기도 하다. 작품의 명장면 중 명장면은 박종기와 김계선의 '용호상박' 대금 대결이겠다. 위트 넘치는 씨름 장면으로 그렸다. 발 뒤에서 연주되는 대금 소리에 맞춰 두 사람이 합을 주고받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리듬을 탄다. 음악에 탁탁 맞춰 떨어지는 그들의 구성진 춤사위가 일품. '얼쑤' 하는 추임새가 절로 튀어나온다.
'적로'의 공연 모습
적로는 '창극'이 아니라 '음악극'을 표방한다. 국악이 주를 이루지만 형태는 세련된 한국형 뮤지컬에 가까워 세대 불문 즐길 수 있다. 실제로 17개 곡 중 판소리가 들어간 것은 손에 꼽을 정도고, 당시 대중음악에서 현대음악까지 다양한 장르가 녹아 들어있다. 연극과 뮤지컬계에서 내로라하는 이들이 합심해 나온 결과물이다. 음악은 현대음악전문연주단체 TIMF앙상블 예술감독인 최우정 작곡가가 맡았다. 전통적인 진혼곡과 소리 외에도 당시 유행했던 스윙재즈와 현대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곡을 섞어냈다. 여기에 대금, 아쟁, 소리북 등 전통악기뿐만 아니라 신시사이저, 드럼, 클라리넷 등 다채로운 소리를 사용했다. 대금을 연주하는 박명규 씨는 박 명인의 고손자기도 하다. 무대는 구석 한쪽에 세워진 호젓한 자작나무가 전부다. 고아하면서도 세련됐다. '옥상 밭 고추는 왜'로 한국문화공간상 무대디자인부문을 받은 박상봉 무대디자이너의 솜씨다. 연출은 무용, 연극, 뮤지컬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있는 안무가 겸 무용가 정영두가 맡았다. 이번 재연 무대에서는 연출이 배우들의 움직임과 표현, 동선을 보다 세밀하게 수정해 더 높은 완성도로 공연을 선보일 예정이다.
'적로'의 공연 모습
'적로'는 지난해 9월 자연음향 국악 전문 공연장을 내세우며 개관한 '돈화문 국악당'의 개관 1주년 작품으로, 당시 평단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이번 공연에는 초연에 참여했던 안이호, 정윤형, 하윤주와 더불어 새로운 배우들이 합류한다. 대금산조의 창시자인 명인 '박종기'역은 초연에서 안정된 연기를 보여준 '안이호'와 재치있는 입담과 실감나는 연기력까지 갖춘 소리꾼 '이상화'가 맡아 열연을 펼친다. 김계선 역에는 초연 당시 과감한 연기와 발군의 소리 실력으로 호평받은 정윤형과 차세대 기대주인 소리꾼 조정규가 연기한다. 이와 함께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의 여창 가객 하윤주, 조의선이 신비롭고 비밀에 싸인 기생 '산월' 역에 캐스팅됐다. 배우들이 작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만큼 음악극 '적로'는 배우들마다 자신의 개성 있는 소리와 연기로 같은 대본이지만 전혀 다른 느낌을 선사할 예정이다.
적로
공연안내 음악극 <적로>
  • 일시2018. 12. 7 금 ~ 30 일 평일 20시, 수 15/20시, 토· 성탄절 14/18시, 일 15시
  • 장소서울돈화문국악당
  • 관람료전석 20,000
  • 예매서울돈화문국악당 홈페이지 및 인터파크 티켓 사이트
  • 문의02-3210-7001~2
자세히 보기
  • 김연주(매일경제 기자)
  •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해 2015년에 매일경제에 입사했다. 연극, 뮤지컬, 국악, 무용, 클래식 등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할 문화예술을 취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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