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OICE

추천명약

깊이에 넓이를 더한 전통오늘과 가까워지다

글 정원(공연칼럼니스트)
우리와 함께 살아 숨 쉬며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앞서가기도 하는 문화. 과거의 보존과 계승을 위해 변화를 수용하고, 오늘과 가까워지기 위해 기꺼이 발맞춰 걷는 전통예술의 부단한 노력이 깃든 세 공연을 살펴보았다.
종횡무진전통음악

전통음악은 국악이다. 그러나 국악이 곧 전통음악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국악과 전통이 등호를 이루던 시대는 이미 과거가 됐다. 서양음악계가 클래식 음악과 현대음악을 분리했듯, 현대국악을 비롯한 오늘날의 전통예술을 칭하는 새로운 용어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지금. 대륙과 대륙을 자유롭게 오가듯 장르 간 경계가 허물어진 틈을 타, 뿌리 깊은 전통을 중심축으로 삼고 다양한 예술세계를 누비는 오늘날의 예인들은 저마다의 시선과 감각으로 전통예술의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그려나가고 있다.

21세기 문화계를 관류하는 '협업'과 '융복합'의 바람은 일제강점기와 근대화의 역풍으로부터 전통을 지키기 위해 문을 걸어 잠근 전통예술계를 두드리며 예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벽 너머의 세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이미 세계화의 흐름에 맞추어 빠르게 변화하기 시작한 이 땅에서 민중의 삶에 녹아들어 오랜 세월 희로애락의 결을 함께했던 전통예술은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 취급을 면치 못했다. 시대의 위협을 피해 힘껏 지켜낸 전통이 대중의 외면이라는 또 한 번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낡은 것'으로 인식되는 국악을 동시대의 대중이 원하는 이 시대의 예술로, 또 그들과 소통 가능한 '우리의 것'으로 변환시키는 작업은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과제였다.

위대한 스승들이 전통의 원형을 지키려 깊이에 집중하며 종(縱)으로 뻗어 갔다면, 보존의 위업을 이어받은 제자들은 동시대의 공감과 지지를 동력으로 삼고자 굳건한 전통을 중심으로 다양한 예술세계를 수용하며 변화를 꾀해 횡(橫)으로 뻗어 나가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보존을 위한 보전'을 좇던 전통예술계는 오늘날에 이르러 '보존을 위한 변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깊이에 넓이를 더한 다채로운 무대로 대중과 활발히 만나고 있다.

변용과 변화로부터 시작
<동초제 춘향가-몽중인>의 한 장면

9월 12일부터 20일까지 두산아트센터에서 열린 <동초제 춘향가-몽중인>은 그 연장선에 올라있는 무대였다. '동초제 춘향가'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춘향가'의 예능보유자였던 명창 동초(東超) 김연수가 정리한 판소리 유파로, 완창에만 8시간이 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안은미컴퍼니의 일원이자 창작국악그룹 '비빙'에서 활동하며 뮤지컬과 연극 등 다양한 장르에서 경험치를 쌓은 소리꾼 이승희는 '동초제 춘향가' 중 '꿈'이 등장하는 대목을 엮어 70여 분의 판소리 <동초제 춘향가-몽중인>으로 재탄생시켰다.

<동초제 춘향가-몽중인>의 한 장면

두산아트센터가 선보이는 창작지원프로그램인 'DAC Artists'의 일환으로 기획된 이번 공연은 성춘향의 탄생을 알리는 월매의 태몽으로 시작되었다. 양반과 기생 사이에서 태어나 반쪽짜리 신분으로 살아가지만, 양반집 규수 못지않은 자태와 총명함을 보이는 춘향의 서사에 초점을 맞춰 몽룡과의 사랑과 이별 이야기가 아니라 불분명한 정체성과 불투명한 앞날을 염려하는 한 여인의 고뇌와 고독에 방점을 찍는다. 완성도 높은 각색과 정교한 너름새와 무대의 활용, 타악과 전자음악, 가야금 등을 활용한 음악적 연출이 춘향의 심리에 설득력을 더해 극에 몰입할 수 있게 도왔다. 원전에 변용과 변화를 가한 판소리는 '춘향'이라는 인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이전에 느껴본 적 없는 공감과 연민을 자아낸다.

시대의 씨줄과 날줄로엮어가는 전통의 미래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역시 전통에 다양한 문화를 접목해 '현재진행형' 전통예술을 엿볼 수 있는 색다른 무대를 준비 중이다. 오는 10월 6일부터 28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진행될 <위대한 유산, 오늘과 만나다>가 바로 그것이다. 대중이 문화유산을 보다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도록 돕고, 동시대와 소통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문화로서의 전통공연예술을 조명하기 위해 기획된 이번 시리즈는 전 공연 무료로 진행된다.

10월 6일부터 28일까지 이어지는 <위대한 유산, 오늘과 만나다>는 우리의 보물에서 인류무형무산으로 지정되며 세계의 보물로 거듭난 19개 종목 중 12개 종목을 유형유산의 보고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나볼 수 있는 시리즈 공연이다. 일찍이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과 함께 '아리랑 컨템포러리 시리즈'를 함께한 바 있는 기타리스트 함춘호가 다시 한 번 음악감독을 맡은 '아리랑'을 첫 순서로, 7일에는 '남사당놀이'와 '농악' '줄타기' '줄다리기' 등 전통 연희가 펼쳐진다. 한글날인 9일에는 세종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인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을 종묘제례악보존회의 시연으로 만나볼 수 있다. 14일에는 강릉단오제보존회가 관객을 찾아 '강릉단오제'를, 21일에는 '처용무'와 '강강술래'의 순서가 마련돼 있다. 특히 13·14·21일 오전에는 정가앙상블 소울지기 등 여러 소리꾼이 '가곡'을, 20·27·28일 오전에는 소리꾼 민은경·김준수·유태평양·장서윤 등의 소리꾼이 무대에 올라 '판소리'를 선보인다. 시리즈가 진행되는 동안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는 인류무형문화유산 우수공연 공모작의 공연도 함께 이뤄지니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누리집(www.kotpa.org)에서 자세한 일정을 확인해보길 권한다.

<위대한 유산, 오늘과 만나다> 공식 포스터
사물놀이 40주년 기념 공연

이에 앞서 9월 30일에는 국회 잔디마당에서 올해로 탄생 40주년을 맞은 사물놀이를 기념하는 특별한 공연이 펼쳐졌다. 사물놀이는 존폐의 갈림길에서 동시대의 문화 환경과 요구에 걸맞게 변화를 꾀하고, 전통의 창조적 계승을 이룬 대표적인 예다. 장터와 마을을 다니며 연희와 곡예를 선보이던 사당패들이 풍물과 굿에 주로 사용하던 꽹과리·징·장구·북을 지칭하는 사물은 과거 즐길 거리로, 또 노동요로, 전시엔 군악으로, 제천의식에선 제악으로 24절기 내내 민중과 함께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상흔이 채 낫기도 전에 찾아온 전쟁과 사회 전반에 일기 시작한 근대화의 바람은 남사당패의 존립 기반이던 마당을 앗아갔다. 유신 정권은 '허례허식 퇴폐풍조'를 명목으로 전통문화를 없애려 했고, 서양문물의 수입과 산업화로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변화한 것이다. 연희가 존폐의 위기에 처했던 그때, 일찍이 사당패에서 재주를 익히고 미국과 유럽 각지를 다니며 전통 타악의 가능성을 엿본 김덕수는 마당에서 즐기던 풍물을 무대에서 즐길 수 있도록 들을 거리에 초점을 맞춰 각 지역의 풍물 가락을 네 개의 타악기를 위한 가락으로 정리했다. 1978년 2월 최태현·이종대·故김용배와 함께 '공간사랑'에서 선보인 '전통음악의 밤'은 전 세계를 신명으로 두드린 사물놀이의 시작이었다.

'All for One, One for All'이라는 주제로 선보이는 이번 무대는 사물놀이와 스트릿댄스 등이 한데 어우러져 40여 년간의 변화를 뛰어넘는 혁신적인 무대로 꾸며졌다. 김덕수를 필두로 명창 안숙선, 한국 스트리트댄스를 대표하는 박성진 서울종합예술학교 교수와 가수 이현도, 앙상블 시나위의 리더 신현식 등 이 시대의 예인 300여 명과 세계를 제패한 500여 명의 춤꾼이 한데 모여 장르와 장르, 3박을 기본으로 하는 장단과 4박으로 이뤄진 비트, 시대와 세대의 융합을 꾀하며 약 2시간 반가량 신명 나는 춤판을 벌였다.

많은 예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변화를 거듭하는 시대와 소통하고, 대중의 삶과 가까워질 수 있는 지름길을 찾아 바지런히 세계를 누비는 중이다. 그들의 행보를 두고 '전통의 파괴'와 '전통의 계승'이라는 의견이 분분하나 지켜져야 할 것은 정신이기에, 이 모든 도전과 시도는 전통예술의 중심에 자리한 진정한 가치로 향하는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줄 것이다. '보존을 위한 보전'과 '보존을 위한 변화'가 치열하게 이뤄지고 있는 지금, 객석에 앉은 우리는 과거와 오늘, 그리고 미래의 전통을 시대의 한줄기로 엮어나가는 현장의 산증인인 셈이다.

  • 정원(공연칼럼니스트)
  • '아름다움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으로 공연예술지 '월간객석'에서 예술의 면면을 살피며 아름다운 것들을 기록하고 널리 전하는 데 힘썼다. 현재는 무대 위와 아래뿐만 아니라 너른 세상 곳곳에 숨어있는 빛나는 것들을 몸소 찾아 나서 이곳저곳을 살피며 기약 없는 여행 중에 있다.

[콘텐츠에 대한 만족도 평가] 위의 기사가 어떠셨나요?

 전송

공진단에서 준비한 다양한 이벤트에 참여하세요! 추첨을 통해 푸짐한 경품을 드립니다.

이벤트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