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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이야기, 해금]세월을 걸어 우리 속으로 들어오다

글 천수림(아트저널리스트)
긴 세월, 먼 길을 걷고 또 걸었다. 걷고 또 걸으며 모양도 소리도 달라졌다. 심장을 뜨겁게 껴안은 채 마음의 소리를 켜게 하는 악기, 해금이 우리에게로 오기까지 그 여정에 담긴 이야기다.
이건, 뒷집 도령이 앞집 낭자보고 가슴 뛰는 소리야.

KBS드라마 <추노>, 설화의 대사 중에서

드라마 <추노>의 한 장면 | 출처 KBS

억새잎이 흔들리는 산중에서 설화는 추노꾼인 대길과 최장군, 왕손이 앞에서 해금奚琴을 켜기 시작한다. 사당패로 떠돌던 설화가 갖고 있는 것이라고는 달랑 '해금'이라는 악기 하나뿐. 조선 땅 어느 곳에도 기댈 곳이 없는 가련한 처지다. 사당패에서 도망쳐 '친오빠가 있었더라면 아마도 저런 눈빛을 하지 않았을까'라는 무조건적인 믿음 하나로 대길을 따라나선 상태다. '밥값이나 하라'는 말에 각종 동물 소리를 내면서 재미를 선사하지만, 바로 이 곡에서만큼은 모두를 상념에 젖게 한다. 설화는 이 곡을 연주하기 전 이렇게 말한다. "이건, 뒷집 도령이 앞집 낭자보고 가슴 뛰는 소리야..." 마치 심장을 껴안고 허공에 줄을 대며 타는 듯한 해금 연주에는 특히 애잔하고, 쓸쓸한 감정이 잘 드러난다.

이 장면에 나온 곡은 조선 최대의 노비 추격전을 담은 KBS드라마 <추노>에 나왔던 해금 연주곡으로 꽃별의 '비익련리比翼連里'라는 곡이다. 극 중에서는 서로를 그리워하는 대길과 언년이의 사랑을 그린 테마곡으로 쓰였다. 사랑의 테마곡으로 쓰인 '비익련리'는 중국을 비롯해 우리나라에서도 오랫동안 '사랑하는 연인'의 비유로 쓰인 말로, 중국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이를 빗대어 지은 장편서사인 장한가長恨歌에 나오는 구절 중 하나다. 비익조比翼鳥는 상상의 새로 수컷과 암컷이 서로 눈 하나, 날개 하나씩만 가지고 있어서 반드시 둘이 있어야 날아갈 수 있다. 연리지連理枝는 뿌리가 서로 다른 두 그루의 나무가 서로 얽혀 하나의 나무처럼 자란다.

지난해 중국에서는 <장한가미마长恨歌密码> 즉 장한가의 비밀코드라는 책이 출간되기도 할 만큼 백거이의 장한가는 여전히 중국인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장한가의 비밀코드는 장한가 중에 양귀비가 그리워 잠 못 드는 황제를 위해 도사가 양귀비의 혼백을 불러내는 구절이 나오는 데서 시작된다. 중국인들에게 '양귀비가 죽지 않았고 살아서 어딘가로 사라졌다'는 추측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해금은 당나라 이후 중국의 속악俗樂에 쓰이던 악기였는데 우리나라는 고려시대 예종 때 전해졌다.1) 해금은 고려가요 중 <청산별곡靑山別曲>에 등장한다. 작자미상의 작품으로 집단창작이라는 견해도 있을 만큼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노래다.

드라마 <추노>의 한 장면 | 출처 KBS
가다가 가다가 듣노라 외딴 부엌에 가다가 듣노라. 사슴이 장대에 올라서 해금을 켜는 것을 듣노라.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청산별곡> 중에서

신윤복의 '상춘야흥'

'사슴이 장대에 올라서 해금을 켜는 것'을 두고 여러 해석이 많지만, 연희집단의 광대로 보는 게 가장 자연스러워 보인다. 해금은 종묘제례악부터 각종 궁중연향악, 풍류, 군대음악, 민속춤이나 민요반주, 무속까지 폭넓게 활용된 악기였다. 특히 민간에서 앵앵 소리를 낸다고 해서 앵금, 행금이라 불리기도 했고, 깡깡이 혹은 깽깽이라고 부른 걸 보면 얼마나 사랑받는 악기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해금은 조선 시대 그림에도 종종 등장한다. 신윤복의 <상춘야홍賞春野哄>이 그 중 하나인데 해금과 거문고, 대금이 어우러지는 연주회를 볼 수 있다. 진달래 핀 어느 봄날에 양반가에서 작은 연회를 여는 모양이다. 악공들이 연주회를 준비하고, 주모는 술을 나르며, 기생들도 양반들 옆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림에서 해금과 거문과 대금소리가 들릴 듯하다. 조선에 이르면 고려 시대에 이 땅에 들어온 해금은 외래 악기가 아니라 우리 악기로 정착했음을 엿볼 수 있다.

신윤복의 '상춘야흥'

중국에서도 '얼후二胡라고도 알려진 해금은 당나라의 북부 유목 민족에게서 시작되어, 해부족奚部族들에 의해 만들어져서 붙여진 이름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2) 해부족은 중국 북부 고대 국가의 이름으로 쿠모라고도 부른다. 몽고어로 '모래', '사막沙漠'의 음역이다. 해금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역추적하다 보면 당나라를 지나 낯선 모래땅의 고대 부족에게 이른다. 당시 당나라는 다민족 통일국가로 경쟁하면서도 외래 문명을 편견 없이, 과감하게 받아들였다. 당나라 북방엔 돌궐, 회홀민족, 말갈족이 살고 있었다. 그러니 해부족이 당나라와 교류한 사실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중국사산책> 3)에는 "천 년 전, 유라시아 대륙에 형성된 비잔틴제국, 아랍제국, 그리고 당나라 왕조는 당시 인류사회 최고의 문명을 꽃피웠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고 쓰여있다. 당나라는 인도뿐 아니라 서아시아의 페르시아, 대식국(사라센제국), 네팔, 아프가니스탄, 미얀마, 동로마, 북아프리카, 일본, 조선(고구려, 백제)도 교류하고 있었다. 요즘도 중국인들은 스스로를 '당인唐人'이라 부르길 즐긴다. 특히 최근 시진핑 주석의 여러 가지 정책을 두고 주요 언론이나 중국인들이 '당나라의 꿈Tang Dream, 즉 당나라 때로 돌아간다는 말로 비유하곤 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7~10세기 세계의 모든 길은 장안長安4)을 향했다. 100만 인구의 장안은 역사상 전례 없는 물질적 풍요를 자랑했다. '오래도록 편안하다'라는 뜻으로 '영원한 도시'를 의미한다. 국제도시인만큼 당시 신라인 일본의 유학생 구법승求法僧, 튀르크(돌궐突厥), 위구르維吾爾族의 무사, 인도, 페르시아, 아랍, 동로마의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실크로드가 무역로뿐 아니라 문화의 길, 예술의 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어쩌면 음악, 악기도 사람들과 함께 여행길에 나섰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 해금이 있듯이 세계 각국에서도 해금과 같은 악기를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해금의 원류는 어느 지역일까. 해금의 원류는 페르시아의 찰현악기擦絃樂器인 레밥Rebab이다. 레밥은 줄을 활로 마찰시켜 소리를 내는 현악기를 말한다. 비올라보다는 크고 첼로보다는 작은 크기로 첼로처럼 무릎 사이에 끼고 활로 현을 마찰해 소리를 내는 악기다. 레밥의 고향은 아랍의 메소포타미아 고대문명은 수메르인, 히타이트인, 앗시리아인과 바빌로니아인의 땅으로 화려한 음악문화를 꽃피웠던 땅이다. 레밥은 킬키약Kylkyiak(키르키스스탄), 마두금馬頭琴(몽골), 얼후二胡(중국), 단니Đàn nhị(베트남), 고큐胡弓(일본) 등 다른 모양으로 변화 발전한다. 레밥은 터키, 이란, 구소련의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서 널리 연주되었고, 이슬람 종교와 함께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도 함께 전해진다. 유럽으로 가면 비올라, 바이올린 등의 모태가 되기도 한다니... 해금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아랍에서 유럽까지 예기치 못한 고대의 음악여행길에 오르게 된다.

  • 마두금 연주 | 출처 유튜브(KTV국민방송)
  • 얼후 연주 | 출처 유튜브(LUYIFEI ERHU)
  • 고큐 연주 | 출처 유튜브(국립국악원)
  • 단니 연주 | 출처 유튜브(Vietnam Plus)
예술은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죠. 희망으로 이어지는 가능성. 우린 모두 희망이 필요해요.

<요요마와 실크로드 앙상블> 중에서

프랑스에서 태어난 중국계 첼리스트 요요마YoYoMa는 바로 이 음악길을 따라간다. 요요마는 1998년 전 세계적인 비영리 문화 및 교육기관인 <실크로드 프로젝트> 를 설립했다. 그는 실크로드 지역에 남아 있는 음악과 패션, 천문학과 점성술, 종교적인 유적들, 예술과학 등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5) 그는 옛 실크로드에 위치한 나라였던 중국, 몽골, 이란, 인도, 터키, 우즈베키스탄 등의 음악가들을 모아 '실크로드 앙상블'을 구성해 공연해오고 있다. 이 내용은 모건 네빌 감독의 <요요마와 실크로드 앙상블> 6)에 소개된다. 다큐멘터리 속에서는 민속 음악과 서양의 클래식, 팝이 만나고, 첼로, 클라리넷, 벤조Banjo, 비파琵琶, 페르시아의 전통 현악기 카만체Kemenche, 한국의 장구, 인도의 타블라Tablā, 중국의 생, 스페인의 백파이프 가이따Gaita까지 다양한 나라의 악기와 뮤지션이 등장한다. 연주자들은 아시아와 유럽을 넘나들던 지중해의 소박한 항구를 지나, 고대 로마의 거리, 유엔 난민 캠프 앞을 지나간다. 우리가 '무역로'라고만 인식했던 고대의 길을 요요마는 음악인들과 걷는다.
공식 영화 포스터
<요요마와 실크로드 앙상블> 메인 예고편
우리가 현재 듣는 많은 악기들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떠나 다양한 문화권과 만나 변이되고 변용되면서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 우리나라의 음악과 악기들도 마찬가지로 긴 여정을 거쳐 우리에게 왔다. 남사당패를 따라 떠돌아다니는 설화처럼 해금도 유랑의 운명을 타고난 게 아닐까. "모든 탐험의 끝은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와 그곳이 어디였는지 처음 깨닫는 것이다." T.S. 엘리어트의 이 말처럼 해금 소리를 듣다 보면 이 애잔한 악기가 누구를 따라 이 땅을 찾았을지... 출발했던 그곳, 비밀에 싸인 그 땅으로 우리를 이끈다.

[각주]1) http://folkency.nfm.go.kr/kr/topic/detail/6375 중국의 악서인 『문헌통고文獻通考』에 따르면 해금은 중국 본토인이 아니라 북방민족인 해족奚族의 악기로, 중국에서는 호부胡部악기로 분류했다. 또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 에 따르면, 해금은 당시에는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이었거나 또는 중국에서 전래되어 우리나라 음악화된 향악鄕樂계 음악에는 물론이고 당나라와 송나라로부터 전래된 당악唐樂계 음악에도 편성이 됐다.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1991)

2) 중국 바이두 https://baike.baidu.com 奚琴又称二胡,始于唐代北方游牧民族,奚部族创造的,故得名.

3) <중국사산책> 쑨례 지음. 이화진 옮김. 일빛

4) 장안은 당나라의 수도이자, 현재의 서안이다. 당서唐書에 의하면 한 나라의 통치 거점을 부르는 별칭으로도 사용됐다. 전제군주제에서는 왕국의 운명이 도읍의 안전 여부에 달려 있으므로, 가장 큰 안전지대라는 뜻으로 여겨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5) <북경살롱> 천수림 지음. 에디션더블유

6) 다큐멘터리 영화 <요요마와 실크로드 앙상블 The Music of Strangers> (2015). 모건 네빌(Morgan Neville) 감독

  • 천수림(아트저널리스트)
  • 삶은 여행의 여정이며, 여행의 영향력은 삶에서 결코 사소하지 않다고 믿는다. 2018서울사진축제 프로그램 디렉터, 월간 <사진예술> 편집장으로 활동했고, 각종 미술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KBS1 라디오 <문화공감>에서 '중국예술기행'을 진행했고, 저서로는 <북경살롱>, <엄마네 레스토랑으로 저녁 먹으러 갈래?>, <세 도시 이야기(공저)>가 있다. 현재는 아트저널리스트이자 시각문화 비평가로 다양하게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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